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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2세와 러시아
1. 알렉산더 2세의 개혁
1) 37세의 나이에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러시아 왕위에 오름.
2) 알렉산더 2세의 치세는 러시아 역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 농노해방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 →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충분
3) 개혁 후기에 정책결정상의 주저와 회의로 개혁의 멋진 마무리는 기대하기 힘듦, 여론은 극단주의적 경향. 그 결과 개혁의 불꽃은 1865년에 이르러 사그러지고 또 다른 반동의 분위기가 등장.
4) 치세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제도의 폐지. 개혁은 알렉산더 2세가 몇몇의 계몽된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아 귀족 대다수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것. 경제적 측면에서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49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상환해야만 했음. 해방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 면적은 너무 적었고 상환금의 액수는 농민들에게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것이었음.
5) 전적으로 지주들에게 일임되었던 지방행정의 전폭적인 재조직이 시급. 1864년에 젬스트보 기구가 수립: 젬스트보 회의의 대의원 선출에는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의 3개 층이 다 참석. 러시아 농촌의 경제적, 문화적 개선을 위해 매우 큰 공헌.
6) 법원의 개혁: 1864년의 개혁에 대해서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이 선포되었고 계급차별도 폐지. 사법부는 행정부로부터 독립. 재판관은 종신제로 임명. 상당한 보수를 받음. 재판이 공개되었고 배심원제도가 수립되었으며 변호사협회가 수립.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완전히 개편.
7) 1874년의 군대 개편: 그때까지는 징병의 부담은 전적으로 하층계급만이 짊어지는 것으로서 그들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지극히 가혹한 조건하에서 군복무를 해야만 했다. 이 개혁으로 국민 모두가 병역의무를 다하는 국민징병제가 실시되고 군복무 기간도 25년에서 6년으로 축소되었고, 복무조건도 상당히 개선. 개편된 군대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

2. 개혁 이후의 변화
1) 알렉산더 2세의 개혁은 계급과 계급 사이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농노제도의 폐지는 인간으로서 자유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별을 없앤 것.
2) 해방된 농노들은 젬스트보 의회에서 그들의 옛 상전 등과 자리를 같이 하였고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다른 계급의 대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음.
3) 농노해방 이후에도 농민은 완전한 시민의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농민공동체의 소속인으로서 그들은 부동산을 자의로 처분할 수 없었으며, 이주나 여행에도 제약을 받았다. 그들만이 지불해야 하는 인두세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아직도 낮다는 증거. 지주와 농민 어느 쪽도 완전히 만족한 것이 아니었음.
4)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 법률가, 대학교수, 기술자 등이 사회에서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 전문직업에 종사하는 중산계급이 출현.
5) 교유과 진보의 길잡이는 더 이상 계몽된 귀족들만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자리는 이제 귀족들보다는 문화적으로 덜 세련됐지만 사회,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는 훨씬 급진적인 중류층 지식인들이 차지하게 됨. 인텔리겐차가 중요한 혁명세력으로 명확안 단체의식을 가지게 되고 조직적인 반정부세력으로 자라게 된 것은 이러한 중산층 계급이 참여한 1860년대 이후부터임. 국민 각계 각층의 지식에 대한 욕구로 인해 귀족층은 전에 누렸던 우월한 지위를 상실해 가고 있었고 대학에서나 중등학교에서 이제 귀족층은 소수에 지나지 않게 됨.
3. 새로운 혁명운동의 출현
1) 이전의 러시아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독일에서 형이상학을 공부한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였다면 새로 나타난 지식인들의 특징은 현실모순의 타파를 위해 행동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음. 1860년대 러시아 사회는 ‘허무주의’라는 사상이 지배: 허무주의는 무엇보다도 모든 전통적 권위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항이었음. 그 목표는 모든 기존 관습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것. 기존 권위에 대한 부정은 은연중 사회적 분위기를 혁명으로 몰아가고 있었음. 진정한 혁명운동은 1870년대에 소위 ‘인민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남. 허무주의자들과 달리 개인의 해방이 아니고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데 관심이 있었음. 1870년대 초기에 지식인층의 청년남녀들은 수백명씩 떼를 지어 농촌으로 몰려가서 이러한 의무(‘인민 속으로, в народ’가서 농민과 함께 살며 일하고 문화적, 사회적 진보의 길로 그들을 인도해야 된다는 것)를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기 시작.
2) 인민주의를 과학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라브로프였지만 선동적인 혁명구호로 만든 것은 바쿠닌이었음. 바쿠닌은 농민공동체 속에서 생활해 온 러시아 농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주의자이며 혁명적 기질의 소유자인 까닭에 이들에게 접근하여 혁명이념을 전파하고 무장폭동을 일으킴으로써 매우 용이하게 혁명이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
3) 인민주의 운동을 재미있는 각도에서 본다면 20세도 채 안된 미숙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소박한 십자군운동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음. 경찰의 감시와 농민들에 의해 고발되기도 함.
4)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더 2세는 페로프스카야가 이끄는 혁명폭도들에 의해 살해당함. 짜르로 상징되는 전제왕정은 짜르만 암살되면 전제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그들의 혁명가적인 단순한 생각들이 테러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 주관이 강하지 못했던 알렉산더 2세는 자유주의 집단과 보수귀족 집단 사이의 정책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 보수반동주의자들의 행동이 결국에는 개혁으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을 엄청난 피해를 보아야 하는 혁명으로 발전하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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