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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의 치세

gams21 2022. 8. 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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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의 치세

1. 결단력의 소유자 니콜라이 1

1) 형인 알렉산더 1세가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로 우유부단한 면이 강했던 반면 니콜라이 1(형보다 19살 아래)는 결단력과 굳은 의지를 지닌 강한 성격의 소유자

2) 12월 당원의 반란 속에 즉위: 30년 치세는 강권과 억압으로 일관.

3) 귀족적이며 수려한 용모: 유럽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 등의 현란한 수식어

4) 토목건축에 관심, 방어벽 구축은 니콜라이가 평생 열성을 다한 지속적인 사업. 전국토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드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임.

5) 과도한 강경책은 군부에 대한 의존으로 연결. 측근은 군인들.

6) 급속히 성장한 행정기구: 황제원(황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황제의 명령집행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 짐)

7) 개인적으로 농노제에 반대. 농노를 해방시키면 귀족계급은 헌법을 요구할 것, 농노제를 유지하면 인민봉기가 야기될 것이라 생각.

8) 절대군주를 반대하는 유럽혁명에 놀란 니콜라이 1세는 완전히 반동적 성격을 굳힘: 대내적 통제를 한층 강화하여 많은 지식인을 투옥하고 교육에 대한 탄압을 시작. 러시아인의 해외여행을 금지.

9) 국내 자유주의적 사상의 탄압뿐만 아니라 국외 혁명운동의 탄압에도 나섬. 유럽의 자유주의 운동에 사사건건 개입: 유럽의 헌병이라는 조롱도 받음.

10) 영토를 넓히고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는 니콜라이 1세의 외교정책이 한몫을 함.

2. 크리미아 전쟁

1) 유럽의 질서를 자기 손으로 지키려던 니콜라이 1세의 과도한 욕심이 유럽열강들과 맞부딪친 사건. 유럽을 지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착각한 니콜라이는 헝가리 민족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봉기했을 때 러시아 군대를 보내어 이를 진압. 가톨릭 성직자와 그리스정교회 사이에 예루살렘 성지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분쟁에도 참견. 터키의 술탄치하에서 거주하는 러시아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

2) 크리미아 전쟁은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이 볼 때는 마치 전제왕정에 대항하여 자유와 문명을 지키려는 성전과도 같은 의미를 가짐.

3) 1853 10월 터키 군대가 다뉴브강 유역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군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 11월 초에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터키에 선전포고. 다음해에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와 손을 잡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깊게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터키의 동맹국들 편에 서서 은근히 러시아에 외교적 압력을 가함. 니콜라이 1세의 러시아는 그들과 맞서 혼자서 싸우는 꼴이 됨.

4) 터키의 동맹국들이 1854 9월 크리미아 반도에 상륙. 해군기지 세바스토폴리를 장악하려는 동맹국의 노력. 11개월 반을 견디어낸 러시아군의 세바스토폴리 방어전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 , 프 연합군은 7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폐허가 된 영웅적인 도시 세바스토폴리를 점령: 도위된 도시의 포병장교였던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리 이야기에 잘 묘사됨. 이 전쟁은 실제 전투보다도 발진티푸스와 기타 전염병에 의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었음. 백의의 천사로 불리는 나이팅게일이 새로운 형태의 야전병원을 설립하여 간호를 근대화시키려했던 곳도 바로 이 크리미아 전쟁터임. 러시아는 자국 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 보급품 조달의 어려움. 후방전선마저 침체상태. 짜르 정부의 위신이 크게 실추. 이 전쟁으로 러시아가 유럽 열강에 비해 경제적으로 얼마나 뒤떨어져 있으며 국가 운영체계 또한 허점이 많았던 것이 노출. 짜르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직접적인 불만의 대상이 됨. 1855 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 누적되어온 복잡한 문제들은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2세에게 넘겨짐.

3. 지식인들의 반항

1) 니콜라이 1세의 숨막히는 반동정치에 반대해 보다 나은 러시아를 구상하는 지식인층, 인텔리겐차가 나타남. 무지한 대다수의 국민을 계몽하고 국가를 개조하려는 민족적 사명감을 가짐. 모스크바대학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 대부분 부유한 귀족의 자제들. 자신들의 풍족함을 위해 많은 농노들이 피와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 함. 개선방향이 슬라브주의와 서구화주의로 갈라짐.

2) 짜리즘에 대해 가장 충격적인 도전장을 낸 사람은 차다예프(나폴레옹 전쟁에 참전, 가톨릭교도): 1836 망원경이라는 잡지에 러시아의 전제정치를 부정하는 역사철학에 관한 서한이라는 글을 실음. 니콜라이 1세는 그 글의 출판을 허용한 모스크바 대학 총장을 해임하고 잡지는 폐간.

3) 어떤 이념이 아닌 행동, 비밀결사 등의 성격을 가진 최초의 모임은 1845년 페트라셰프스키가 조직한 모임. 관념적인 독일철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구체적인 행동과 강령 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서클의 멤버. 이들의 사상은 러시아는 유럽국가라고 하는 점에서 출발. 이들에 의하면 이 후진 유럽인 러시아를 발전시켜 다른 유럽국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영웅이 바로 피터 대제였다고 생각.

4. 19세기 초 러시아의 변화

1) 러시아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짜르에 의한 전제체제와 경제적으로는 농노제였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위협을 받음. 전제체제는 지식인들의 타도의 대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 존속된 농노제도는 농민들의 잦은 반란과 수확의 침체로 위기를 맞음.

2) 1861년에 행해진 농노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농노제는 러시아 농업경제이 핵심이었음. 농민반란은 니콜라이 1세의 즉위 4년만에 무려 40회 이상 발생, 1830년대에는 더욱 빈번해져 약 400여회의 크고 작은 반란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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